韓基範 한남大 철학과 교수
⊙ 1950년 경남 남해 출생.
⊙ 충남大 사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사학 석·박사.
⊙ 現 한남大 중앙박물관 관장.
⊙ 저서: <한국사 신강(공저)>.
설을 앞두고 대전 중구 자원봉사자들이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 썰어 놓은 가래떡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올해는 대전시 창립 60주년, 대전광역시 승격 20주년이 되는 해다. 대전이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행정구역의 역사로 보면 대전시가 올해 回甲(회갑)을 맞는 셈이고, 대전시의 외형이 10배 이상으로 커진 광역시의 역사(직할시 포함)로 보면 올해가 20주년 되는 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李重煥(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대전의 지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주)고을의 동쪽에서 금강 남쪽 언덕을 따라가다가, 계룡산 뒤가 되는 곳에서 큰 고개를 넘으면 儒城(유성)의 큰 평야가 나타나니 곧 계룡산의 동북방이다. 계룡산 남쪽 마을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던 곳이나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골짜기의 물이 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진산(유등천 상류)과 옥계(대전천 상류)의 물과 만나고,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들어가니, 이 냇물의 이름이 甲川(갑천)이다. 갑천 동편이 곧 懷德縣(회덕현)이고 서쪽이 儒城村(유성촌)과 鎭岑縣(진잠현)이다. 동서 양편의 산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고 북쪽에 이르러서는 서로 교차되면서 사방을 고리처럼 둘러막았다. 들 가운데는 평평한 언덕이 굽이굽이 뻗었고, 산기슭이 깨끗하게 빼어났다.>
 
  이중환은 널따란 유성평야와 대전의 세 하천(대전천·유등천·갑천), 그리고 여기에 형성된 조선시대의 대전지역(회덕·유성·진잠), 盆地(분지)로서의 대전 경관을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듯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중환이 바라본 조선시대의 대전지역은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갖고 있는 고을이었다. 이것은 그가 “구봉산과 보문산은 남쪽에 우뚝 솟아 청명한 기상이 한양의 東郊(동교: 동대문 밖)보다 나은 듯하다”라고 한 것이나, “갑천은 들이 넓고 사방의 산이 맑고 수려하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공주는 경계가 매우 넓어서 금강의 남쪽과 북쪽에 걸쳐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성이 가장 살 만한 곳”이라며 대전지역이 사람살기에 가장 적합한 고장임을 강조한다.
 
 
  대전은 ‘신흥 근대도시’인가
 
  대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담론을 할 때 흔히 “대전은 신흥 근대도시여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대전은 역사가 짧고 문화전통이 빈약하다’는 선입견이 배어 있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전은 결코 역사가 짧거나 문화전통이 빈약한 고장이 아니다. 오히려 대전은 유구한 역사와 출중한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는 역사의 고장, 문화의 고장이다.
 
  세간에서 대전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과소평가하는 말들이 나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생각이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대전은 舊韓末(구한말)과 국권 상실기에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새롭게 개발된 ‘신흥 근대도시’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전에는 ‘대전’이라는 지역명, 또는 행정구역명이 없었다는 생각이다.
 
  사실상 대전은 1905년의 경부철도 부설, 그리고 1914년의 호남철도 부설과 함께 그 중간 경유지 또는 분기점으로서 전국적인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1932년에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됨에 따라 신흥 행정도시로 부각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전이 신흥 근대도시적 성향을 지니고 있고, 근대 이전에는 ‘대전’이라는 독자적인 행정구역이 없었다 해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대전은 역사가 짧고 문화전통이 빈약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영역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이후 몇 개 이름의 행정구역을 형성하면서 연면히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지금의 대전지역에는 세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懷德縣(회덕현)과 鎭岑縣(진잠현)과 公州儒城(공주유성)이 그것이다.
 
  회덕현은 대전천과 갑천의 동쪽지역이고, 진잠현은 서부 갑천의 서쪽지역이며, 공주 유성은 공주목의 직할령으로서 지금의 유성 일원과 산내까지의 유등천 양안지역(‘공주 한밭’이라고도 칭해짐)을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회덕과 진잠은 고려 초부터 사용하던 이름이고, 유성은 통일신라로부터의 이름이다. 물론 이 지역들은 그 이전 삼국시대에도 각기 다른 이름들로 존재해 왔었다. 이 세 지역의 역사가 바로 지금 대전의 뿌리이고 대전의 역사인 것이다.
 
100년 만에 한국철도의 심장부로 거듭나는 대전역.
 
  대전이라는 이름의 역사
 
  대전이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초기의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1486)이다. 이 책의 충청도 공주목 ‘산천조’를 보면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大田川(대전천)의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 대전이라는 지명은 閔鎭綱(민진강)의 <楚山日記(초산일기)>(1689)에서도 확인된다. <초산일기>는 그 유해가 정읍으로부터 葬地(장지)인 수원까지 운구되는 전 과정을 생생하게 수록한 장례기록이다.
 
  이때 송시열의 유해를 운구해 갈 상여꾼은 각 동네의 社倉契(사창계)에서 조달했는데, 그 고을의 이름들 중에는 주산·마산·배달촌(白達村: 지금의 송촌의 옛 이름) 등의 이름과 함께 ‘大田(대전)’이라는 동네 이름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전통시장인 ‘5일장’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徐有(서유구)의 <임원경제지>(1827년)나 <호서읍지> 등에 수록된 ‘大田場(대전장)’이 그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시의 대전장은 2·7일장이었다. 현재 대전에는 대전장이 없어졌지만, 유성장(4·9일장)과 신탄진장(3·8일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당시 대전장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후 대전이 행정구역명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지방관제의 개정 때부터다. 이때 대전은 회덕군 산내면 大田里(대전리)로 나타난다. 이후 대전은 대전군 대전면(1914)→대전읍(1931) →대전부(1935)를 거쳐 대전시(1949) →대전직할시(1989) →대전광역시(1995)로 발전해 왔다. 올해가 바로 대전시 역사의 60주년이 되는 해다.
 
  대전이라는 지명의 역사는 이런 문헌적 기록보다 훨씬 더 소급될 수 있는 단서를 가지고 있다. 대전이라는 한자식 표현의 어원인 ‘한밭’이라는 한글식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大邱(대구)가 달구벌에서, 扶餘(부여)가 소부리에서 淵源(연원)된 것과 같은 이치다.
 
  조선시대에는 대전의 일부가 공주 직할령이었고, 그것을 ‘공주 한밭’ 또는 ‘공주 유성’이라고 불렀다. 비록 공주목의 직할지였지만, 대전의 역사에서 보면 그것은 ‘유성’이고 ‘한밭’이었던 것이다.
 
  한밭이라는 명칭의 역사는 실로 유구하고 그 뿌리가 깊어 대전이라는 이름이 점점 더 큰 독자적 행정구역명으로 성장해 갔음에도 본래의 이름으로, 또는 애칭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왔다. 오늘날 대전인들은 ‘한밭’이라는 이름을 여러 분야에서 널리 애용하고 있다. 예컨대 한밭중학교, 한밭고등학교, 한밭대학교, 한밭인물지 등과 같이 校名(교명)이나 공공도서의 이름으로 쓰기도 하고 한밭대교, 한밭운동장, 한밭도서관 등과 같이 공공시설의 이름으로도 널리 애용하고 있다. 한밭은 대전의 옛 이름이면서, 동시에 현대인들도 즐겨 애용하는 대전의 대명사인 것이다.
 
 
  선비의 고장 대전
 
  유림사회에서 대전은 흔히 ‘선비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이 고장에서 朴彭年(박팽년), 宋時烈(송시열), 宋浚吉(송준길)을 비롯한 출중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됐고, 그 영향이 문중과 학맥을 통해 연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雙淸(쌍청·맑은 바람과 밝은 달)의 정신으로 청정하게 살다 간 雙淸堂 宋愉(쌍청당 송유)의 隱德不仕(은덕불사)의 삶이 있었다. 오늘날 충청인의 기질을 말할 때 흔히 淸風明月(청풍명월)이라 하는데, 박팽년이 쓴 記文(기문)에 의하면 회덕의 송유의 쌍청정신은 청풍명월의 한 원류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대전의 역사에서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정신을 보인 대표적인 사례로는 회덕 황씨家(가)의 ‘미륵원 봉사’와 은진 송씨가의 ‘기민구제’를 들 수 있다.
 
  彌勒院(미륵원)은 지금의 동구 마산동에 있었던 私設(사설) 여관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을 고려말의 인물 황연기(?~1352)가 다시 복구했다. 황연기는 회덕 황씨의 시조인 懷川君(회천군) 황윤보의 아들이다. 그는 이곳에 미륵원을 중건해 겨울마다 삼남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해 20년간을 봉사했고, 후손에게 사업을 이어갈 것을 당부했다. 이 사업은 그의 아들 黃粹(황수)의 4형제와 손자 黃自厚(황자후)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 100여 년간이나 꾸준히 계속됐다.
 
  이러한 전통시대 대전의 봉사정신은 현대의 대전사회에서도 지자체의 활동을 통해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전광역시가 전개해 온 ‘복지 만두레’ 사업이나 ‘무지개 프로젝트’ 사업이 곧 그것이다.
 
  다각적인 협동체계를 구축해 그늘지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면서 주민의 힘으로 도우며 살게 하자는 것이 ‘복지 만두레’라고 한다면, 어려운 동네의 생활환경과 교육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주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 동네 차원에서 빈곤을 극복하고 재생의 의지를 키워갈 수 있도록 희망을 주자는 운동이 ‘무지개 프로젝트’ 사업이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현재 대전에는 각종 사회사업 자원봉사자가 12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대전광역시 인구 150만명의 8%에 달하는 숫자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고, 또 남과 더불어 살고자 한 대전의 옛 정신을 잇는 사례일 것이다.
 
 
  과학도시의 盟主 도시
 
1973년 한국표준연구소 기공식.
  대덕연구단지 조성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73년, 표준과학연구소를 필두로 연구소의 단지 입주가 시작된 것은 1978년부터였다. 대덕연구단지가 대전시에 편입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이후 1992년에 연구단지 조성 준공식이 이루어졌고, 이듬해에 세계과학박람회인 ‘93 대전엑스포’가 개최돼 대전이 과학도시로서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00년에는 ‘대덕밸리 선포식’이 있었다. 대덕밸리란 대덕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제3, 4산업단지, 대덕테크노밸리, 자운대와 계룡대, 유성관광특구, 둔산행정타운, 원도심의 산업을 잇는 성장축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대덕밸리는 보다 넓은 의미로 벤처기업의 요람인 대전을 중심으로 천안·아산 테크노파크, 청주·오창의 과학산업단지, 전주·익산의 신벤처육성지구를 포괄하는 중부권 삼각지를 지칭하기도 한다.
 
  대덕연구단지에는 첨단 연구소와 벤처기업들이 밀집돼 있고, 대덕과학산업단지나 대전 3, 4산업단지 등 산업기반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특히 2004년에는 대덕연구단지 일원이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지정돼 연구기능과 생산기능이 결합된 세계적 과학도시로 성장할 제도적 준비를 갖추게 됐다.
 
  앞으로 대덕개발특구 사업이 완성되면 대덕연구단지와 대덕밸리는 미래 한국을 개척해 갈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며, 대전시는 활력이 넘치고 경쟁력 있는 경제과학도시로서 한국경제 성장을 이끄는 새로운 중심축이 될 것이다.
 
  대전은 1993년의 세계과학박람회 이후 그 여세를 몰아 세계과학도시연합(WAT)을 결성하고 그 盟主(맹주) 도시가 됐다. 2009년은 그 10주년을 맞는 해다. 또한 대전은 올 10월에 대덕연구단지 일원에서 국제우주대회(IAC)를 개최한다. 대전이 첨단 과학도시임을 세계에 알리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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