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규모 큰 행사들 책임지는 예술감독·총감독 도맡아
⊙ “살아오며 4~5시간 이상 잠자 본 적 없어… 차 타고 잠깐씩 토막잠”
⊙ “배역 다른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자기 인생, 자기 경험 있어”
⊙ MBC 2002년 한일월드컵 전야제 실패로 공황증 앓기도
⊙ “전통에서 ‘찾고’ 최첨단 기술을 ‘비벼서’ 새로운 콘텐츠 ‘만들어야’”
⊙ “이어령 선생은 반대를 하더라도 꼭 대안을 내놨다”

表在淳
1937년생. 연세대 사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배재대 명예박사(경영학) / 동양방송 PD, MBC PD·TV제작국장, SBS프로덕션 사장, 서울예대·연세대 교수,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대통령 직속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역임. 연극영화예술상(1966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6년), 대한민국 훈장 체육장 맹호장(1989년)·동백장(1996년)·보관문화훈장(2007년)·은관문화훈장(2014년)
그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방송·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 ‘한국 문화계 역사의 산 증인’. 신화, 산 증인이라는 호칭은 쉽게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표재순(表在淳). 1937년 12월 30일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 연극배우로 출발해 연극·뮤지컬 연출가, TV 드라마 PD로 활동하며 수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TV 드라마 〈대원군〉(1972) 〈제1공화국〉(1980), 연극 〈빠담빠담빠담〉(1976) 〈옛날옛적에 휘어이 훠이〉 (1976) 등이 떠오른다. 더 나아가 국가적 차원의 대형 행사들에서 예술감독 및 총감독을 맡아 역량을 발휘했다.
 
  지면상 굵직한 것만 나열하자면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제작단장 겸 총연출(1988년), 광복 50주년 중앙경축식 총감독(1995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예술감독(1999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개회식 예술감독(2000년), 한일월드컵 전야제 총감독(2002년), 그리고 2003~07년 하이서울페스티벌 총감독, 2012~17년 경주문화엑스포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행사 때는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에서 23일 동안 46개 프로그램이 9개 분야(전시·공연 등)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져 무려 485만 명이 관람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세종문회회관 초대 이사장으로 재직했고 이명박 정부 때는 문화관광부 산하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행정가로서도 추진력을 펼쳐 보였다.
 
  그간 삶에서 거쳐 온 직함도 배우, 연출가, 감독, 이사, 사장, 교수, 위원장, 이사장 등 화려하다. 혹자는 ‘한 시대의 르네상스맨’이라고 부르는데 2009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식 때 바쳐진 ‘전설의 왕PD’라는 호칭은 방송 연출가로서 위상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미디어 인터뷰에 응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표씨 성(姓)과 반대로 “표시 나지 않게 살고 싶었다”는 그를 무척이나 무덥던 지난 8월 29일, 서울 홍제동 현대사기록연구원에서 만났다. 딸의 부축을 받아 택시에서 내리는 그의 백발(白髮)은 마치 무관(無冠)의 왕자(王者)를 떠올리게 하며 세월이 빚어낸 위엄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재밌었다”
 
젊은 시절의 표재순 PD. 드라마 〈대원군〉, 연극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 등 수많은 작품을 연출했다.
  표재순 감독은 1937년 12월 30일 생이지만 호적상에는 ’38년 1월 17일생이다. 경성부 상왕십리정 2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표영운(表榮雲), 어머니 김창선(金昌善) 슬하의 10남매 중 막내였지만 “위에 형님 한 분, 누님 한 분이 먼저 돌아가셔서” 8남매 막내로 자랐다. 아버지는 밭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마흔둘에 나를 낳으셨어. 그때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시어머니가 애를 낳았다니까, 나를. 젖이 잘 없으니까 암죽(곡식으로 묽게 쑨 죽)을 끓여 먹였는데 죽을 것 같았는지 이불에 돌돌 말아서 그냥 윗목에 놔둬서 죽을 때까지 기다렸대. 일주일이 돼도 죽질 않은 거야. 그러니 이놈이 살 놈인가 보다, 그래서 다시 암죽을 끓여 먹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무, 배추, 쑥갓, 파 같은 채소를 키워 왕십리중앙시장, 배오개시장이나 동대문 밖 황학시장에 가서 거래했다고 한다. 한때는 ‘표영운상회’라는 야채 가게를 크게 했는데 왜 그만뒀는지 알 수가 없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언쟁을 해도 “어허, 어허” 할 뿐 맞서지 않을 정도로 성격이 좋았다. 막내아들이 첫 연극을 연출할 때 신촌까지 버스를 타고 와 군밤 한 봉지와 함께 건넨 아버지의 “재밌었다”는 한마디가 표 감독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말씀이 어눌하신 게 아니고 그냥 간단명료하셨다”고 한다.
 
  왕십리 옆집이 만담가로 유명한 장소팔(張笑八·1922~2009년) 선생 댁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이생활》이란 잡지를 읽는 시간이 많았다. 이 잡지는 1925년 창간해 ’44년에 폐간됐는데 주로 동화, 동시, 소설 등의 문예작품과 위인 전기, 성경 이야기, 역사물 등을 다루었다. 방인근(方仁根·1899~1975년)의 작품 〈소영웅〉이 잡지에 실렸는데 주인공 이름이 ‘막동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알게 됐지만 그 소설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번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윤석중(尹石重·1911~2003년), 박화목(朴和穆·1924~2005년), 한정동(韓晶東·1894~1976년)이 쓴 아동문학 작품들을 읽고 성장했다. 이 같은 독서 경험이 상상력과 모험심의 원천이 되어, 훗날 그를 ‘왕PD’로 성장하게 한 씨앗이 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큰형(表順男)은 선린상업학교를 나와 미도파백화점(서울 명동) 맞은편의 식표품 상회인 마스다 쇼텐(增田) 상회 점원으로 취직해 일찌감치 장삿길로 들어섰죠. 설탕, 맥분, 식료품, 양식(洋食) 기구 및 잡화를 팔았어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사람이 떠나자 큰형이 그 가게를 물려받았습니다. 상호는 ‘서울식품점’.”
 
 
  광무극장에 대한 기억
 
  “둘째 형(表在煥)은 일본에 유학을 갔었는데 2차대전 위험 때문에 ‘아버님 위독’이라는 전보를 쳐서 다시 서울로 불러들였어요. 둘째 형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훗날 양평의 궁백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사나 고사를 지낸 떡을 일체 먹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죠. 종교와 어린이 교육에 전념했는데 어린이 잡지 《새벗》 《새가정》의 편집장, 미션스쿨인 정신고교 재단 감사를 지냈죠. 나도 어린 시절 이 잡지의 교열을 봤어요.”
 
  셋째 형(表在相)은 자동차 운전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운전은 강원도 출신이 잘한다는 소문이 많았다. “강원도 산골이니까 험한 길을 잘 달릴 것이라는 속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탄광 주변에서 운전을 했고 해방 후에는 관급(官給) 차량을 몰았다. 조병옥(趙炳玉) 선생이나 경무대 쪽 관계자 차량을 몰다가 나중에 큰형이 하는 서울식품점의 총괄지배인이 되었다.
 

  넷째 형(表在學)도 운전을 잘했고 해방 직후 결성된 우익 단체 대동청년단과 관련이 깊었는데 그 인연으로 경찰관이 되었으며 서울 신당동 로터리에 있는 율원파출소장을 지내다가 공직에서 은퇴했다.
 
  “다섯째 형(表在明)은 경기중에 다닐 만큼 공부를 잘했어요. 당시 다이아몬드 모양에다 ‘경기’라고 찍힌 교표를 문패처럼 대문에 달아 놓으면 동네 자랑이었죠.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어이, 이런 초가집에서 경기를 다니냐’ 할 정도였어요. 재학 시절에는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오르간, 피아노도 잘 쳤어요.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고려대 교수를 지냈죠. 서울대 철학과 동기가 배우 이순재 씨입니다.”
 
  ― 표 감독님은 어린 시절 문화예술과 친숙했나요?
 
  “나는 왕십리교회를 다녔는데 그 옆이 배명학교야. 이 교회 맞은편이 광무극장이었어. 영화를 전문으로 했던 극장인데, 무성영화라서 변사(辯士)가 있어요. (변사조로)‘때는 바야흐로 녹음이 우거진 시절에 말이야.(미소) 나쁜 서부와 좋은 서부가 만났으니’ 이러고 나올 때거든. 좋은 서부는 존 웨인(John Wayne)이고, 나쁜 서부는 악역 배우지요. 그러니 얼마나 재밌어. (다시 변사조로)‘여기는 빠리(파리), 여기는 영국의 빠리.’ 그럼 객석에서 ‘아니다!’ 그러잖아. (변사조)‘아니, 여기는 스페인의 빠리’라고 하면 또 ‘아니다!’ 하고 관객이 외치고, 그러면 (변사조)‘그렇다. 스페인엔 빠리가 없다’ 이러고 나가다가 맨 마지막엔 (변사조)‘빠리는 빠리였던 것이었으니….’”
 
 
  타잔, 문지기, 氣動車, 소금쟁이
 
MBC 드라마 〈임꺽정〉(1972년)을 연출할 때의 표재순 PD(맨 오른쪽 앉은 이).
  표 감독은 이런 말도 했다.
 
  “해방 이후 광무극장에서 봤던 영화 가운데 〈타잔〉의 인기가 좋았다고. (노랫조로)‘아아~ 아아아아~!’ 하면서 숲속에서 타잔이 나오고. 그다음에, 악극을 많이 했어요. 무대가 작고 세트라고 해봐야 무대 뒤에다 그림 한 장 걸어 놓고. 광주리에다 잔뜩 종이를 썰어 놓고 종잇조각을 날리는데, 이게 눈이야.”
 
  초등학교 다닐 때 〈동명성왕〉이라는 연극으로 처음 무대에 섰던 기억이 새롭다. ‘궁궐 문지기’ 역을 맡아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었단다. 대사 한마디 없이 서있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배를 잡고 놀리며 웃어댔다.
 
  “몽둥이 하나 들고 서있었거든.”
 
  ― 몽둥이요?
 
  “작대기. 그게 창(槍)이야. 한 시간 내내 서있는 게 전부야. 역할이 수위지. 말하자면 문지기, ‘포졸1·2·3’ 같은 것. 그렇게 무대에 올라가서 한쪽 귀퉁이에. 누가 보면 세트지 뭐. 좀 행세하는 집안 애들한테는 좋은 역 주고, 우리같이 장난기 있는데 얌전한 것 같으면서도 사고뭉치 같은 놈들은 그런 식으로 벌을 주는 거예요. 가만히, 아무것도 없이.
 
  유년 주일학교에서 연극이나 합창 같은 유희를 하면서 소셜 네트워크랄까, 사람과 사람 간에 어떤 사귐, 그런 훈련을 하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 이런 것을 배웠고 그런 것이 훗날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가 던진 말은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인생에서 점(點)들을 미리 연결할 수는 없다. 다만 뒤돌아봤을 때 점들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나요?
 
  “(왕십리역 근처에 있던) 성동역에 춘천 가는 기동차(氣動車·디젤 기관차)가 있었는데 그 기동차가 여러 량(輛)이 붙어 가지고… 그걸 타고 뒤를 돌아보면 뱀 꼬리처럼 이어져 신나게 달리는데 바람이 싸악 느껴져. 또 신설동에 경마장이 있었는데 마부들이랑 얘기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리는 거야.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관찰이랄까, 풀 메뚜기 개구리 소금쟁이 같은 걸 보는 게 좋았어요.
 
  동네에 소 발굽을 만드는 대장간도 있었고 유리병 공방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어. 커서 대장간이나 차리면 좋겠더라고. 공부를 아주 못하는 건 아닌데도 노는 데 정신이 없어 가지고….(웃음) 장난이 심해 시계니 뭐니 다 뜯어 보고 말이지. 지금도 뭘 만지면 고장을 내는데 딸들도 그렇고 집사람이 아주 뭘 만지지 못하게 해요. 만지면 고장을 내니까.”
 
 
  “이놈이 장사하는 기질이 있구나”
 
1966년 연극영화예술상을 수상하며 표재순 감독이 두 손을 들고 있다.
  ― 자료 조사를 해보니 6·25 때 대구로 피란을 가셨더군요.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로 지냈죠. 대구 대봉동에 미8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그 부대 앞에 가면 사람들이 수백 명씩 모여 있었어요. 레이버하우스(Laborhouse)라고, 일종의 근로청이죠. 새벽같이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럼 그날의 일감을 나누어 사람들을 뽑아요, 순서대로. 그러니까 인상도 좀 좋아야 되고 키도 좀 커야 되고…. 나도 한 이틀 어른들하고 같이 삽질을 했는데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동촌비행장이라고, 지금 K2라고 불리는 ‘미군 전폭 연합비행대대’가 있었어요. 거기로 뽑혀 가 하우스보이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고 장사를 했어. 그땐 전시 상황이어서 팔 게 있으면 다 내다 파는 거예요. 대구역 앞 양키시장에서 통조림도 팔고, 아지노모토(味の素)라는 일본 조미료도 팔았어요. 그걸(조미료를) 드럼통째 사가지고 밀가루 포대에 소분(小分)해서, 말하자면 방문판매를 하는 거죠. 그렇게 대구시내 바닥을 하루 한 바퀴씩 도는 거예요. 중국집, 냉면집, 설렁탕집 같은 데를 갔는데 그땐 조미료가 굉장히 귀했어요. 끓는 탕에다 요만큼만 넣으면 고기 맛이 확실히 나거든. 원가가 1만 5000환이면 소매로 팔면 3만환에 파는데, 방문판매를 하니까 2000환 정도 붙이고 3000환도 붙이고, 많이 팔아 주는 데는 싸게 주고 가끔 어쩌다가 팔아 주는 데는 조금 비싸게 팔고. 장사하는 분들도 그냥 물건을 받으니까 편하잖아요. 팔다가 남으면 싼값에 팔고. 키는 요만한 놈이 말이야.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때 우리 큰형님이 ‘이놈이 장사하는 기질이 있구나’ 그렇게 인정을 하셨어요.”
 
  감독은 단순히 작품을 연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자와 출연진 사이에서 조율하고 설득하는 협상가의 역할도 수행한다. 어린 시절 장사에도 능했다는 그의 이러한 경험이 감독으로서 협상력과 추진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음을 엿보게 한다.
 
 
  “도중에 연극에 미쳐 가지고…”
 
  “점원 생활 하면서 손님이 왕이라는 걸 배웠어요. 하얀 것도 (손님이) 빨갛다고 그러면 빨간 거고, 빨간 것도 누렇다면 ‘네, 맞습니다’. 절대 아니란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지.”
 
  ― 그렇습니까? 손님을 가르치면 안 되는군요.
 
  “안 되죠. 비 오는 날 손님이 우산 들고 오시잖아요. 나갈 때 비가 그치면 우산을 그냥 두고 가신다고. 그럼 손님이 당시 무슨 옷을 입었고 이런 것을 메모지에다 적어 놔요. 만약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어 우산을 창고에 넣어 둬요. 다음에 그 손님이 오면 ‘지난번에 깜빡하셨지요?’ 하면서 우산을 건네면 그 손님은 다른 데 안 가고 다시 오신단 말이죠.
 
  여름날 복숭아나 참외를 팔 때 손님이 오시면 우선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러곤 냉장고에 넣어 둔 시원한 과일을 벗겨 가지고 잡숴 보라고 드립니다. 시원하고 맛있으니까 한 보따리 사가요. 그러면 한번 온 손님은 다시 오거든. 그렇게 하라고 어른들한테 배웠어요. 누구한테나 겸손하게 머리 숙이고 살라고 배웠습니다.”
 
  ― 그런데 상대(商大)를 안 가고 사학과에 진학하셨네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산을 타곤 했는데, 산에 가면 절이 있잖아요. 절에서 대웅전을 쳐다보게 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었기 때문에 (절에) 가서 이런 건(큰절) 안 했는데 그래도 부처님 뵙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어린 나이에도. 마침 황수영(黃壽永·1918~2011년) 선생님이 연세대에서 불교미술을 가르치셨어요. 원래 동국대 교수신데 연세대 강사로 오시면서, 제가 연세대 사학과에 가서 불교미술을 좀 해볼까 하다가 도중에 연극에 미쳐 가지고….”
 
 
  “어쨌든 끝을 봐야 하니까”
 
  ―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대학 2학년 때 친구랑 산에 가려고 했는데 약속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아. 그래서 찾다 보니까 의과대학 지하실에서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더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너, 누구야? 들어와.’ 2년 선배인데 대본 연습을 시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비는 행운을 싣고(The Rainmaker)〉라는 연극 대본을 들고 연습을 시작한 거예요.”
 
  마치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긴 듯, 운명처럼 연극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대사가 좀 많았다. 두 번째 무대에 설 때는 다섯 마디, 그다음에는 두 마디, 그다음에는 대사 없이 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도저히 연기자를 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키는 작지 코는 납작하지 소리는 맹맹거리지, 눈은 크지도 않고. 우선 외모가 안 되는 거야. 당시 서울대 이순재 씨가 가장 배우 같은 얼굴이에요. 고려대에선 김성옥 씨라고 배우 손숙 씨의 남편인데 워낙 연기가 좋았어요. 연세대에는 오현경 씨가 있었죠. 그런 분들에 비해 나는 연기자가 될 요소가 없는 거야. 그래서 무대감독으로 시작을 해가지고 연출로 들어갔는데 결국 그걸로 평생 밥을 먹게 된 거죠.
 
  연극이라는 것이 그냥 연극 하나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종합예술이라고, 인문학에서 역사에 이르기까지, 하다못해 건축 의상 식생활, 이걸 전부 종합을 하거든요. 조명만 해도 그러니까(복잡하니까) 골고루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단 말이죠. 기왕 공부하는 김에 좀 더 파고들어 가자. 호기심이 워낙 많기 때문에 끝까지 파고들어 간 것이죠. 좋게 얘기하면 열정이고 어떻게 보면 극성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봐야지. 하지만 어쨌든 끝을 봐야 하니까.”
 
 
  “‘표 감독’이 제일 무난하잖아”
 
표재순 감독은 예술감독, 연출가, 사장, 교수, 이사장, 위원장으로 살아왔다. 그래도 ‘감독 표재순’에 가장 애착을 느낀다.
  ― 종지부를 찍는 성격이시군요.
 
  “왜냐하면 그 중간에 중지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잖아요. 또 주변에 친구들이 참 좋았어요. 다들 열심히 했어요. 뭔가 좀 알고 가자, 모든 걸. 그래서 기초부터 닦기 시작한 것이 결국엔 뿌리를 내렸다 할까.”
 
  표 감독은 “그러니까 남들이 하는 방법대로 하면 안 되는 거야”라며 이렇게 말했다. “남들 하는 거 쫓아가면 만날 2등을 하잖아요. 2등을 누가 기억합니까? 2등 한 마라톤 선수를 기억합니까? 1등만 기억하지. 1등은 왜 어려우냐? 2등이 쫓아오니까 계속 쳐다보면서 ‘저 자식이 얼마나 왔나’. 피곤한 거지. 2등은 앞만 보고 그냥 달리면 스트레스를 안 받잖아. 대신 2등은 이름이 없는 거지.”
 
  ―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감독, 연출가, 사장, 교수, 이사장, 위원장 등등… 애착이 가는 호칭이 있으신가요?
 
  “말씀드렸지만 연극 가지고 밥을 먹기가 어려우니까 TV 연출로 갔거든요. 조연출부터 시작해 연출로 간 거고, 그다음에 방송 기획을 했고, 그러다 보니까 행정으로 돌아서 제작부장, 국장, 프로덕션 사장까지 했어요. 그다음에 방송을 그만두면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됐는데 저는 박사 학위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또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등 호칭이 많은데, 제 주변에서는 다 나보고 감독이라고 그래요, 감독. 별명은 ‘표털’. 수염이 많았어요. 지금이야 없지만. 그래서 ‘표 감독’이 제일 무난한 거잖아?”
 
  표 감독은 “살아오며 잠을 4~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거든요. 드라마 PD들이 다 그래요. 대신 낮에 토막잠을 자요. 아무데서나 10분 20분 30분씩. 내 경우는 사무실 의자에서 못 자요. 움직이는 차 속에서는 잠이 와요. 차 타고 잠깐씩 토막잠을 잔다고. 평생 잠을 그렇게 깊이 오래 잔 경험이 없어요. 집사람도 ‘그렇게 잠 안 자고 어떻게 사냐’고 하지만 여태 90이 다 돼서까지 사니까.”
 
 
  “신화적인 존재? 당치 않은 얘기”
 
  ― ‘신화적 존재’ ‘산 증인’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증인이라는 말은 내가 그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옮기면서 제작이라든가 (방송) 경영, 운영이라든가 이런 거에 대한 증인이 될 수가 있는 거죠. 또 TV를 하다가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하게 되니까 그 이후 국가 행사를 쭉 했단 말이죠. 총감독, 기획자 이렇게 하다 보니까 외곬수의 길이랄까. 결국 다 합해서 하나의 길이라고 그러면, 연출의 길은 맞아요. 하도 장르가 많다 보니까 돌아가신 장민호(張民虎·전 국립극단장·1927~2012년) 선생님께서, 우리(연세대) 연극부 대선배인데, 그분이 어느 날 술좌석에서 ‘야! 니 전공이 뭐이냐?’고 하셨어요. 그걸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 멀티 세상 아닙니까, 모든 게 융복합되는 세대이기 때문에….
 
  신화적인 존재라고? 당치 않은 얘기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신화가 되는 게 아니잖아.”
 
  ― 여전히 성공을 꿈꾸며 밤을 지새우는 40~50대 직장인에게 한말씀 해주십시오.
 
  “지금 밤 새워 일하는 40~50대들 보면 참 딱한데, 우리는 돈이나 무슨 명예를 보고 뛰질 않았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걸로 밥이라도 먹고 있었으니 그게 전부란 말입니다. 딴 거 욕심을 부릴 수 없어요.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더 열심히, 남들이 잠잘 때 잠 못 자고, 남들 좀 놀 때 좀 더 많이 다녀야 되고, 또 여러 사람 만나야 되고, 연출이라는 게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 얘기를 들어야 되고. 연극 한 편을 공연하면 40~50명이 나오지 않습니까? 배역이 다 다르거든요. 그럼 배역이 다른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자기 인생이 있고, 자기 경험이 있고, 자기 입장이 있고, 그게 얽히고설켜서. 수십 수백 가지 시계 부품이 모여 초침이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여기도 마찬가지거든. 연극 하나를 하더라도 수십 수백 명의 삶을 같이 살아 주는 거란 말이죠. 누구는 앞서고 누구는 뒤에 처지면 앙상블이 안 생기죠.”
 
 
  ‘관객을 즐겁게!’
 
1995년 표재순 감독은 광복 50주년 중앙경축식 총감독을 맡았다. 경축식은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 광장 일대에서 광복회원과 해외 동포 청소년 및 일반 시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가운데 양복을 입은 이가 표재순 감독.
  ― 그렇군요.
 
  “지금 힘들어도 꿈이 있고, 목표도 있을 거고, 가능하면 자기 능력껏,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열심히 하다 보면 나름대로 거둬지는 게 있지 않겠어요? 싫어하고 안 좋은 것 계속 해봐야 결국은 시간 낭비고 손실이지. 좋아하는 것이면 제일 좋고, 조금 덜 좋아하더라도 좋아하고….”
 
  ― 공감합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잘못을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너그럽게 포용하는,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어렵게 사시는 분들한테 용기 잃지 말고, 좀 희망을 갖고, 가능하면 자기가 하는 일에 좀 재미를 붙이고, 더 좋아하려 노력하고, 그러면 훨씬 덜 힘들게 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 감독님의 연출 철학은 뭔가요?
 
  “‘관객을 즐겁게!’입니다. 내 연극이나 작품을 보러 왔을 때 우선 즐거워야 돼. 사는 것도 골치 아픈데 극장까지 돈 내고 와서 골치가 아파야 돼? 즐겁게! 즐거워하려면 재미가 있어야지. 내 연출 철학은 재미예요. A도 재미고 Z도 재미고, 재미 없는 연기를 왜 돈 받고 파느냐고.”
 
  말 그대로 놀이하고 즐기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특성을 읽어 낸 후, 표 감독은 이에 맞게 실천으로 옮겨 온 셈이다.
 
  ― 그래도 진지한 작품도 중요하잖아요.
 
  “진지한 거는, 재미 속에 진지함도 있어요. 연극의 묘미라는 거는 재밌게 봤어, 끝났어, 겨울철 됐어, 따뜻한 군밤을 까먹다가 문득 뭔가가 뒤통수를 치는 거예요. 과거가, (연극에서) 본 것이 자기 생활하고 뭔가 짚이는 게 있잖아요. 교감이 되니까. 이건 내 지론(持論)이 아니고 이해랑(李海浪·1916~1989년) 선생의 연출론이에요. 무대는 단순한 삶의 재현이 아니라 관객이 ‘아, 저건 내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다가도 다리가 오그라져요”
 
표재순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제작단장 겸 총연출을 맡았다.
  ― 실패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된통 한번 실패한 적이 있었어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전야제 총감독을 맡았는데, 저는 원래 이어령 선생하고 월드컵 개막식을 맡기로 했어요. 그때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상암동 경기장의 천장에다 쇠고리를, 좀 커다란 추를 걸어서 플라잉 머신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게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축구장 센터서클에 지하 동굴을 파가지고 그 안에서 500명이 두더지 새끼마냥 올라올 수 있게 빅쇼를 준비하려 했어요. 하늘로 날아 댕기고 땅에서 솟아나고, 제2의 천지인(天地人)을 구상한 거지.”
 
  ― 제1의 천지인은 뭔가요?
 
  “그건 88 서울올림픽 때 했던 개폐회식 콘셉트였지. 그건 조금 있다가 설명할게요.
 
  그래서 서울시가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경기 두 달 전인가 석 달 전인가 현장에 가보니 잔디에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가 그 안에 있어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콘셉트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이어령 선생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쭈니 ‘그만두자’ 그러셔서 정식 파기 공문을 보냈어요. 개막식은 안 하는 걸로.
 
  그랬는데 전야제를 MBC가 맡게 됐어요. ‘MBC 멤버들이 다 고생하는데 당신이 총감독을 해야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맡게 된 거죠. ‘이번에는 운동장도 중요하지만 한강을 중심으로 펼치자’ 해서 월드컵공원에서 어마어마하게 준비를 했어요. 무대 전체를 대나무 숲으로 만들어 자연 융화적으로 하려고 남원 쪽의 어느 대나무밭을 완전히 간벌(間伐)했어요. 무대가 전면 무대, 후면 무대가 있어서 스위치만 누르면 대숲이 들어오고 나가게 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수미 씨도 무대에 오르기로 했는데, 비가 와가지고…. 비가 올 것에 대비해 전날부터 천막을 치고, 연주도 녹음으로 대신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악기 하나에 수천만~수억원이나 하잖아요. 비가 오면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예산이 없다고 녹음도 안 하고, 천막도 돈이 없다고 안 쳤어.
 
  그날따라 새벽부터 인천 앞바다에 시커먼 구름들이 몰려오는데 아무래도 사달이 날 것 같아. 결국 무대 한쪽에 물이 쏟아지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철수를 하는 거야. 그것도 생방송 중에. 그래서 15분가량 공백이 생겼어. 그 공백을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간신히 채웠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자다가 다리가 오그라져요, 아이고. 공황증(恐惶症)을 극복하는 데 1~2년이 갔어요. 사람들에게 실패한 이야기를 하면 제일 좋아해.”(웃음)
 
 
  “뒤집어 보고 뜯어 보고 잘라 보고 부숴 보고”
 
표재순 감독이 1988년 10월 2일 서울올림픽 폐회식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그보다 앞서 88 서울올림픽 당시 개폐회식 총연출을 어떻게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누가 어떻게 추천했는지 자세하진 않아. 조직위원회 중에 한 분이 추천했겠지. 어쨌든 개폐회식 대본은 IOC 본부에서 통과가 돼야 합니다. 그럼 그 방향대로 비주얼을 만드는 거예요. 소리와 그림을 그 대본에 의해 만드는 거지요.
 
  처음엔 내가 개회식을 맡았고 폐회식은 서울예대 유덕형(柳德馨·87) 총장님이 맡으셨는데 그분은 조명 전문가거든. 폐회식은 조명이 필요하니까. 나는 통과가 되어 한 달여 동안 그림을 그려 가지고… 마침 유고슬라비아에서 세계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는데 개폐회식 행사에 보내 준다길래 유 선생님과 같이 가기로 돼있었어요. 비행기를 타러 가는데 그분이 못 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폐회식까지 맡기로 한 거지.”
 
  ― 어떤 내용을 담으셨나요?
 
  “삼재(三才) 사상이라고, 천지인(天地人), 하늘·땅·사람의 화합을 이상적인 삶으로 우리 선조들이 바라봤어요. 하늘에서 파라슈트(낙하산)가 내려오는데 전 세계 공중낙하 하는 분들이 뛰어내리는 겁니다. 그다음, ‘인천항에서부터 태평양, 대서양 물을 한데 모아, 세계의 기(氣)를 모아 잠실벌에다 놓는다’, 화합의 장이 되는 거지. 그게 천지간의 화합이 되는 거고, 거기에 마당에서 뛰어노는 사람들이 더해지는 겁니다. 천지인은 희랍(그리스)에서 말하는 소위 지덕체(智德體)와 똑같애.”
 
  ― 이어령 선생님은 이 행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기획단 단장이지. 누가 반대라도 하면 끝까지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시죠. 조목조목, 문명학적으로, 문화사적으로, 동양철학을 동원해서. 내가 수없는 회의를 많이 다녀 보았는데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반대를 하시더라도 꼭 대안을 내놓으신다고. 대안을 내놓는 분을 내가 보질 못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당신이 체득할 때까지 생각하고 뒤집어 보고 뜯어 보고 잘라 보고 부숴 보고, 이래서 납득이 돼야 콘셉트가 나오는 거거든요.”
 
이어령의 못다 이룬 꿈
  상암동 ‘천년의 문’과 ‘서울링’
 
  1999년 2월 무렵이다. 표재순 감독이 이어령 선생을 찾아갔다. 표 감독이 외국의 밀레니엄 이벤트에 관해 수집한 자료를 참고로 해서 말씀드렸더니 이어령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뭘 한댜?”
 
  “새천년 준비사업으로 문화관광부와 서울특별시가 각각 ‘기념 조형물’과 ‘평화의 탑’을 계획하고 있고, 전국 지자체마다 제각기 해맞이 행사와 더불어 기념 조형물 건립을 경쟁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광부와 서울시의 건립 내용물이 차별화되어 중복이 안 되고 예산의 낭비 요인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자체까지 난리라니 이를 국가 차원에서 통합해 추진해서 국가적 사업이 돼야 하지 않을까?”
 
  두 달 뒤인 그해 4월 대통령령으로 ‘새천년준비위원회’가 발족하고 이어령을 위원장으로 19명의 위원이 위촉되었다. 표 감독도 당연히 준비위에 포함됐다.
 
  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재단법인 천년의 문’이 설립됐다. 향후 1세기(100년) 동안의 시간을 두고 10년마다 1개씩 ‘열두 대문’을 세우기로 하고 그 첫 번째 문을 ‘천년의 문’으로 명명했다. 여기다 남북통일의 해에 ‘통일문’을 지으면 12개의 문이 된다. 열두 대문은 12간지의 순회라는 이미지로 동양적 철학을 기반으로 했다. 장소는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상암경기장으로 정했다.
 
  국제 설계 공모를 거쳐 홍익대 김영원 교수의 높이 약 64미터, 폭 37미터의 거대한 구조물 ‘천년의 문’이 당선됐다. 그러나 과도한 규모와 예산 문제(약 1000억원 추산) 등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표 감독은 “얽히고설킨 사연 때문에 착공조차 못 하고 좌초가 된 ‘천년의 문’은 아쉬움을 넘어 두고두고 ‘천년의 한(恨)’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년 전 2023년 3월 마포구 상암동에 대관람차 ‘서울링(Seoul Ring)’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서울링은 영국의 런던아이를 벤치마킹한 반지 형태의 대관람차로 이어령 선생이 꿈꾼 ‘천년의 문’과 관련이 있다.
 
  “40여 년 동안 왜 나를 따라다니지?”
 
  ― 두 분이 같이 한 작업이 많지요.
 
  “이어령 선생님을 모시고 나는 많은 행사를 제작하고 진행하며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어요. 서울올림픽을 비롯해 대전 세계과학엑스포,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새천년준비위원회, 밀레니엄 광화문 2000, 디지로그 사물놀이,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등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 이어령 선생의 어떤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까?
 
  “마지막 임종 때는 못 뵙고 몇 달 전에 뵈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표 감독은 40여 년 동안 왜 나를 따라다니지? 다른 사람들은 거의 한 번 와서 다 도망가는데…’ 그러셨어요.”
 
  ― 다 도망가는….
 
  “갑자기 멍해지더라고요. 그렇잖아요. 그러더니 ‘내가 내놓은 아이디어나 모든 생각들이 틀린 게 하나도 없지?’ ‘아유, 족집게십니다’라고 내가 답했어요. ‘한 번도 틀린 게 없으니 여지껏 제가 선생님 곁에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니 그제야 웃으시더라고요. 그게 마지막 모습이에요.”
 
  ―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 오랫동안 예술감독, 총감독으로 관여해 오셨지요.
 
  “1회 때부터 참여를 했거든요. 그게 꽃이 핀 게 이스탄불에서였어요. 2013년이었을 겁니다. 이스탄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46개 행사를 하고.”
 

  ― 무려 485만 명이나 관람했다고 하더군요.
 
  “아야소피아 성당, 술탄아흐멧 광장, 탁심 광장 등지에서 행사가 진행됐어요. 다 합치면 400만 명이 넘는 거지. 소피아 성당 앞에다가 한옥을 지었거든. 소위 한국의 정신이랄까, 신라의 정신을 한번 알려 줄 수 있는, 그게 다분히 어떻게 보면 불교의 정신이라 그럴까. 경주에서 시작해 가지고선, 실크로드라는 게 원래는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이스탄불까지인데 우리는 종점을 경주로 삼은 거지. 신(新) 실크로드라고 할까. 신라 혜초 스님이 평택을 거쳐서 시안으로 갔다가 서역으로 갔듯이. 경상북도가 목숨을 걸고 시작한 거거든. 그래서 경주에서 돌을 갖다가 평택(한국의 관문 항구)에다 하나 세우고, 중국 시안(실크로드의 동쪽 기점), 이란의 실크로드 중심 거점 도시인 이스파한, 그리고 이스탄불에 ‘문화의 탑(塔)’ 혹은 ‘상징탑’을 세웠어요. 행사가 끝날 적에 ‘문화 헌장’을 만들어 가지고 27개국에다 공포를 했어요. 신문화의 감명이랄까.”
 
  ― 일반 사람이라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스케일이네요.
 
  “혼자 한 것은 아니니까. 당시 김관용 경북 지사가 굉장히 추진력이 있고 예산도 아끼지 않고 팍팍 쓰고.”
 
  ― 그런 창의성이나 독특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해서 나오나요? 경험인가요, 타고난 감각인가요?
 
  “새로운 게 없어요. 성경 ‘전도서’에 보면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있는 것을 잡아내 비트는 것, 그게 장기야.”
 
 
  “찾고, 비벼서, 만들어야”
 
문화융성위원장 시절의 표재순.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하여 공연장·영화관·박물관 등의 관람료를 할인하는 등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했다.
  ― 아니, 배우가 막 연기만 잘하고 해서 다 큰 배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운도 있어야 되고….
 
  “기본적으로는 인문학이 기초가 되는 거죠. 거기서 물을 길어 올리는 거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표재순 감독은 제2기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대통령 직속 기구로 전통문화 재발견, 창조경제 연계, 국민 문화 향유 확대를 핵심 과제로 운영되었다. 표재순 위원장은 당시 문화융성 정책을 ‘창조경제의 양날개이자 마중물’로 강조하며 문화 재정을 2012년 1.14%에서 2015년 1.72%로 확대 편성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하여 공연장·영화관·박물관 등의 관람료를 할인하는 등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했다. 이 정책은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 실행되고 있다.
 
  “매주 마지막 수요일에는 오후 5시 이전 영화를 5000원에 관람할 수 있고 공연장·미술관·박물관은 관람료 할인 또는 무료로 개방했어요. 스포츠 경기 역시 입장권을 할인했어요. 국민이 ‘한 달에 한 번은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문화 습관을 형성한다는 취지였어요.”
 
  ― 문화융성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적이 있나요?
 
  “문화융성위원장을 1년여 하면서 독대는 못 했는데 한번 기회가 있어서 갔더니 다른 장관 여럿이 와계시더라고요. 제가 대통령에게 문화융성에 대해 아주 쉽게 말씀드렸어요. ‘찾고, 비벼서, 만들어야 한다’고요. 우리 전통에서 ‘찾고’, 최첨단 기술을 융합해 ‘비벼서’, 비빔밥 만들듯이 비벼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그 콘텐츠로 하여금 국민에게 행복을 좀 나눠 주자! 이 행복의 대상은 우리 국민이고 세계적으로 보면 인류지요. 행복을 나누자, 전 세계 인류의 행복을 나눠 보자. 다른 말로 평화! 행복!”
 
 
  “운명이라면 운명, 팔자라면 팔자”
 
배우 최불암(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표 감독은 평생 소처럼 살아왔다. 그러고 보니 소띠다. 소는 평생 밭을 가는 존재다.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지 소의 몫은 아니다. 소는 그저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릴 토대를 만들 뿐이다.
 
  “동양화가 이만익(李萬益·1938~ 2000년) 화백이 그린 판화가 집에 있었어요.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데 소 한 마리 앞에 노인이 앉은 그림이에요. 소가 밭을 택하는 바도 아니잖아요. 천생 밭을 우직하게 갈다가 가는 것 아닙니까. 하다못해 소는 꼬리조차 버릴 게 없어요. 흔한 얘기로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팔자라면 팔자죠. 소는 주인 행세를 할 수도 없잖아요. 소는 밭 가는 게 본래 그 일이니까 천부적인 업(業)이고, 거기다 씨 뿌리고 물 주고 꽃 피워 열매 맺으면 누군가 가져갈 게 아닙니까.”
 
 
  “소는 밭 가는 게 천부적인 業이고”
 
제공=파카(PARKER) 만년필
  ― 표 감독님은 본분대로 살아오셨군요.
 
  “본업대로 만족하고 살면 되지, 괜히 욕심 부리고 딴 생각을 하면 본분을 잃는 겁니다. 지금 사회라는 게 본분을 모른다거나 알고도 안 지킨다든가, 그냥 멋대로 가는 경향도 있기에 그런 것에 대한 경계랄까, 스스로…. 소 행세나 하고 살다 가라.”
 
  공교롭게도 표 감독은 생일도 서양 별자리로 염소자리(Capricorn), ‘뿔 달린 염소’다. 어느 시각에서 보든 그는 우직하게 살아야 할 운명이었음을 말해준다.
 
  ― 혹시 좌우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묘비명을 생각한 적이 있는데, 누구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든가, 좋은 말이 많잖아요. 저는 표씨가 돼서 ‘표시 안 나게 살다가, 어쩌다 표시가 나서, 어쭙잖게 여기 누워 있다’ 정도?”
 
  ― 평생을 정상(頂上)으로 사셨는데 책 내신 것도 없고.
 
  “없습니다.”
 
  ― 내셔도 수십 권은 나와야 마땅한데요. 경험이 워낙 다양하셔서.
 
  “내가 글 쓰는 재주가 있었으면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그러나 그가 남긴 묵직한 발자취에서는 이미 몇 권의 회고록이나 자서전보다 더 큰 이야기를 하는 울림이 전해진다.⊙
ⓒ monthly.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